2009년 11월 20일
다산 단상
다산의 대표저작이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이서일표이겠지만, 요즘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저술은 내가 읽지 않을 책들인 『대학공의』와 『논어집주』이다. 그의 「일본론」과 아들들에게 썼던 서간들을 살펴보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일본론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 '과거로 관료를 뽑는 폐단이 없어 조선의 학문을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언급한 학자들은 뜻밖에도 주자학자들이 아닌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였다. 둘은 모두 젊은 시절 주자학에 열중했었던 사람들이며, 상품 경제가 날로 성장해가는 당대 일본과 주자학의 관념론이 엮는 모순을 발견하고, 결국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다산이 남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주자학계보다도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더욱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그는 청의 고증학파와도 교류를 나누었으며,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왕양명을 언급할 때 별다르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명 본토에서도 왜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을 하냐며 논쟁을 벌이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당대의 성리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그의 날선 비판을 접할 때마다 조선 후기의 주자학 근본주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 결코 현대인의 오만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반갑기만 하다. 에도 일본에서 주자학 이전의 유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듯이, 다산 역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리라.
당시 서학교도로 몰려 유배 중이었던 그의 처지와 불과 100년 전에 벌어졌던 사문난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와 불굴의 용기에 대해서 경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론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 '과거로 관료를 뽑는 폐단이 없어 조선의 학문을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언급한 학자들은 뜻밖에도 주자학자들이 아닌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였다. 둘은 모두 젊은 시절 주자학에 열중했었던 사람들이며, 상품 경제가 날로 성장해가는 당대 일본과 주자학의 관념론이 엮는 모순을 발견하고, 결국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다산이 남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주자학계보다도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더욱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그는 청의 고증학파와도 교류를 나누었으며,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왕양명을 언급할 때 별다르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명 본토에서도 왜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을 하냐며 논쟁을 벌이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당대의 성리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그의 날선 비판을 접할 때마다 조선 후기의 주자학 근본주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 결코 현대인의 오만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반갑기만 하다. 에도 일본에서 주자학 이전의 유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듯이, 다산 역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리라.
당시 서학교도로 몰려 유배 중이었던 그의 처지와 불과 100년 전에 벌어졌던 사문난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와 불굴의 용기에 대해서 경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 by | 2009/11/20 22:41 | 앤틱남자되기!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