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단상

다산의 대표저작이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이서일표이겠지만, 요즘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저술은 내가 읽지 않을 책들인 『대학공의』와 『논어집주』이다. 그의 「일본론」과 아들들에게 썼던 서간들을 살펴보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일본론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 '과거로 관료를 뽑는 폐단이 없어 조선의 학문을 추월했다.'고 평가했다. 그와 함께 언급한 학자들은 뜻밖에도 주자학자들이 아닌 고학파인 이토 진사이와 오규 소라이였다. 둘은 모두 젊은 시절 주자학에 열중했었던 사람들이며, 상품 경제가 날로 성장해가는 당대 일본과 주자학의 관념론이 엮는 모순을 발견하고, 결국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인물들이다.

다산이 남인으로 분류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본 주자학계보다도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더욱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그는 청의 고증학파와도 교류를 나누었으며,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왕양명을 언급할 때 별다르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명 본토에서도 왜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을 하냐며 논쟁을 벌이던 것이 조선의 선비들이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 역시 당대의 성리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이고, 그의 날선 비판을 접할 때마다 조선 후기의 주자학 근본주의 풍토에 대한 비판이 결코 현대인의 오만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반갑기만 하다. 에도 일본에서 주자학 이전의 유학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듯이, 다산 역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리라.


당시 서학교도로 몰려 유배 중이었던 그의 처지와 불과 100년 전에 벌어졌던 사문난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와 불굴의 용기에 대해서 경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by ουτις | 2009/11/20 22:41 | 앤틱남자되기! | 트랙백 | 덧글(0)

난 된장녀 한 번 만나보고 싶은데 ㅋㅋ

녀동생에게 들은 모 녀대 이야기.

미팅자리에서 만난지 10분만에 연봉이 얼마인지를 묻고, 얼만지 듣고는 30분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남자측은 나름 서울대 경영대 나오고 또래 중에는 잘 나간다고 자부심이 대단했을 터인데 ㅋㅋ), 대체 저 정도 연봉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떤 남자를 만나나 봤더니 펌의 파트너급인 30대 중후반의 남자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는 그런 녀자들!!...


왜 내 주변에는 저런 여자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싶은데!! 저런 여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너무 궁금한데, 나랑은 놀아줄 리가 없으니 어서 성공해서 만나 봐야겠따.

by ουτις | 2009/11/12 00:39 | 오늘 내 머릿속 | 트랙백 | 덧글(7)

이헌창 교수의 "제3의 시각"

이헌창 교수의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제3의 시각" 보러가기

a4용지 24페이지의 글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내재적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변증법적 지양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시대에 대해 거칠게 요약하자면, 내재적발전론에서 이어지는 수탈론과 정체론에서 이어지는 식민지근대론이 대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전근데 조선에 대한 평가에 있어 이헌창 교수는 독특한 스탠스에 서 있다. 조선이 정체상태였음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정체론을 거부한다면, 자력으로 근대화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내재적발전론 역시 거부한다.

60년대 이후 내재적발전론에 의해 제기된 많은 연구 성과에 의해서, 정체론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재적발전론 역시 문제점을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이헌창 교수의 평가는 다음의 문장에 잘 드러난다.

"내재적발전론은 해방후에 식민주의사관인 조선사회정체론을 비판하고 민족적 자기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요청된 사론으로서, 그러한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 사명을 다하였다고 생각된다. 해방후 한국의 경제,사회,정치의발전은 현대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선사회정체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재적발전론에 대해서 이헌창교수가 제기하는 문제점 중에 특히 곱씹어볼만한 것은 '대외적 충격이 문명사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가?'이다.

그는 윌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을 즐겨 인용하는데, 서유럽의 프랑스, 스페인에서조차 자본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심지어 영국조차 중상주의 유럽이라는 환경과  대항해시대 없이 산업화를 발생시킬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즉, 산업화라는 것은 우리보다 상공업이 훨씬 발전했으며 세계지도를 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확장했던 서유럽에서조차 영국이라는 한 곳에서 발생하여 (어쩌면 네덜란드까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과 비교하여 극단적으로 고립되었던 조선의 근대화 자생 가능성을 묻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질문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조선이 스스로 근대를 피워낼 수 없었던 것은, 프랑스 북부 이탈리같은 지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3국 중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은 물론 열강화에 성공했던 일본에서도 할 수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반면 '얼마나 근대 이행에 적합하였는가?'는 질문은 이보다 유효할 수 있다. 서구와의 만남이라는 외부충격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근대로 이행하기 쉬운 상태였나를 묻는 것은 훨씬 나은 질문이 될 수 있다. 짧은 식견으로 감히 말한다면, 이것이 '제3의 시각'이다.

이 관점에서 그가 내린 조선시대에 대한 평가는, 내재적발전론자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정도의 점수일 것이다. 그는 소농사회론을 지지하며, 송상 등의 활약을 인정한다고 해도 북부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이전에 이룬 상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경제적으로 '근대화'라는 곳에 도달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거리가 남아 있었다.

반대로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에 있어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보기에는 일제의 영향력을 악영향 위주로 평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단은 지금 내가 다루려는 부분이 아니므로 여기서 패to the 스 ㅋㅋㅋ

by ουτις | 2009/11/11 23:46 | 심심풀이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안정적인 사회

TV와 아줌마들이 한국 젊은 처자들을 다 망친다.



결국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자식이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의 좁은 문을 향해서 꾸역꾸역 몰려간다. 이런 우리의 자화상이 낮은 실업률과 더불어 낮은 구직률, 그리고 산더미같은 고시생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찬연히 빛나는 결정체가 소위 말하는 '취집'일 것이다. 맨주먹으로 둘이서 어떻게든 차근차근 모아볼 생각일랑 하지를 말고, 조건 갖춘 남자 만나라는. 우리 부모 세대는 이렇게 우리에게 모험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전형적인 greedy algorithm의 실패사례로, 혼자서 저러면 똑똑한 일이겠으나 전원이 저렇게 행동할 때 사회전체로 보면 비효율의 극치다. 각 개인이 저렇게 행동할 때, 우리 사회 전체로 봐서는 과연 얼마나 안정적이 되었을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ㅋㅋㅋ

by ουτις | 2009/11/11 01:27 | 오늘 내 머릿속 | 트랙백 | 덧글(2)

한국경제통사 근세 정리.

책 자체는 개항기 이후 근대에 중점이 두어져 있기는 하지만, 근세에 대한 부분을 요약정리해보려는 의도로.

top-down 방식으로 근세 조선의 경제를 묘사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호혜/(정부의) 재분배/시장이 차지한 비중을 살펴보는 것이 될 듯하다. 이헌창 교수도 이 부분을 3장 商品市場과 商人資本의 成長 파트에서 서두에 두고 있다. 경제학 원론 첫 시간쯤에 '시장이 촹임'하는 결론으로 끝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 파트가, 경제사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경제라는 것을

  • 무엇을 / 어떻게 생산해서,
  • 누구에게 분배하고
  • 누가 어떤 절차에 의해서 이런 결정들을 내리는가?

라고 할 때, (스티글리츠 경제학 1장) 이것을 어떤 기구에 위탁할 것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시장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한반도에서 생각보다 늦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보고가 서해상의 해상 무역에서 활약한 9세기 이후 한반도의 해외무역에 대한 자세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국가 기관에 의한 재분배는 점차 강조되어 갔으며, 군단(群團)사회로부터의 전통에서 이어진 호혜 역시 여전히 중요한 자원 교환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호혜와 재분배의 압박 속에 시장은 위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상업의 필요성은 인정되었고 배제되지는 않았으나, 상업을 말업末業으로 여겨 천시하는 분위기는 고려조 초기 이미 자리잡았다. 여말 선초에 사전私田을 금지하고 과전법을 실시한 일과 명의 사무역 금지책, 해금海禁 등은 이런 풍조를 더욱 부추겼다.

그리하여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1567년에서 1576년 사이 한 달 평균 42.4회 물건을 호혜관계로서 주고 받는 동안 1.35회 물건을 거래하였다. 다시 말해서 16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물건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주고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자본 원격지 유통은 있었고, 소규모이나마 장시는 널리 퍼져 있어서 지방에서도 시장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담 스미스는 "거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타인의 선의에 주로 기대 살지 않는다." 고 말했다. (Nobody but a beggar chooses to depend chiefly upon the benevolence of his fellow-citizens.) 그런데 그거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한편 1592~1601년간 오희문 집안의 기록인 쇄미록에 의하면, 월간 상거래는 평균 1.7회, 선물 교환은 20회였다. 오희문 집안은 유희춘 집안보다 상거래 비중이 컸을 뿐더러, 영리목적의 시장 교환이 두드러진다. 1596년 5월 미역 25동을 구입한후, 20동을 보리와 바꾸어 시세차익을 실현하려 하였다. 1599년 4월에는 "영동의 어물과 미역은 매우 비싸 말을 세내어 사오면 반드시 잉여가 없고 도리어 손실을 볼 것"이라고 적고 있다.

오희문 집안은 유희춘집안보다 신분이 낮아 선물을 적게 받았고, 임진란이라는 상황이 호혜를 나눌 여유를 앗아갔을 수도 있다. 이것들을 감안했을 때 30년 시차를 둔 이 두 기록 사이의 차이는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장시는 현저하게 성장하였고, 18세기의 "승총명록", "이재난고" 등의 일기에는 시장교환이 선물교환을 압도하게 된다. 예천 박씨가의 기록을 보면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5일에 한 번 꼴로 장시를 이용하게 되었고 선물은 재화 구매액의 15%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 도시화는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선물을 받을 기회는 사족, 그 중에도 유력가문에게 많을 것이며 일반 농민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내가 참고로 한 책만을 가지고 보면 거래와 선물 교환의 횟수만이 언급되었을 뿐 그 가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마지막으로 시장/호혜/재분배 간의 비율만큼 중요한 문제는, 저러한 자원배분 내의 비율 뿐만 아니라 자급자족과 재배분 되는 비율이라는 중요한 축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 극적인 변화는 유의미할 것이다. 이 글은 서포트ㅎㅎ를 목적 중 하나로 하고 있으며, 붉게 표시한 부분 중 어딘가에 17세기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있다.

by ουτις | 2009/11/10 00:28 | 심심풀이 | 트랙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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