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침략 전 일본에게는 왜관을 통하는 대마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정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왜관에서 서울까지의 지리를 숙지하고 있었고 조선어에 능통했었다. 이들은 임란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587년 다치바나 야스히로, 이후 소 요시토시와 겐소 등의 첩자성 사신들을 보내왔다.
반면 조선은 어떠했던가?
일본학자들은 조선에서 왜를 바라보는 관점이 16세기를 기점으로 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15세기 초에 "노송당 일본행록"이 나왔고, 중반에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라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문록이 씌이던 분위기가, 16세기 이후에 변했다는 것이다. 신숙주는 죽기 전 "일본과 화평을 잃지(失和) 말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고 성종은 사신을 파견했으나, 사신들이 풍토병을 얻는 바람에 중도에 귀국했다.
그 이후 무려 150년 가까이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징비록에 의하면 조선은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 실각도 오다 노부나가의 실각도 파악하지 못한 채 10년을 보냈다.
일본이 이런 격변기를 겪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에 조선에서는 기축옥사로 물경 1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 중에는 최영경의 팔순노모도 끼어 있었다.
나는 명대의 당쟁과 환관의 전횡이 청대에 비하여 병적인 데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결과적으로 명대의 정치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너무 무리한 평가는 아닐진데, 이 평가에 쓰인 잣대가 조선에 대해서는 달라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 조선 후기의 당쟁에 대해 지적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비호가, 오히려 아직도 식민사학에 대한 컴플렉스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은 아닌가?
드디어 1589년 11월에야 일본을 둘러보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이 파견되고, 돌아온 이후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쟁 준비가 충분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 이전 150년간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농민들을 몇 만 명씩 소집한 것으로 소집 능력을 평가한다면, 서울에서 갑사를 단 300명을 모으지 못하여 이일이 출발하기까지 3일이나 걸린 점 역시 지적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는 말에 비추어, 일본군이 위태로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교훈은 활용되었을까? 적어도 한 세대간은 그랬던 것 같다. 선조가 임란 중 여진족의 사정을 시찰하여 남긴 보고서는 지금도 당시의 만주족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고, 광해군 역시 대단히 치열한 정보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귀중한 교훈의 활용이 한 세대를 넘긴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하멜이 표류해 왔을 때 조선 조정은 이들을 억류하기에 바빴을 뿐, 이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내는 데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결국 서구에 대한 정보도 그다지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을 때, 일본은 이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를 책 한 권 분량을 뽑아냈으며, 그들로부터 "조선이 10여년간 하지 못한 일을 일본은 하루에 해냈다." 라는 비아냥이 남겨졌다.
이것은 사실 상당한 고질로, 이후 아편전쟁 직후 일본이 서구문물을 공부하기 위해 메이지 차원에서 애쓸 때도 조선에서는 몇몇 선구적 인사들의 개인적 노력으로밖에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구 견문이 10만 단위로 인쇄될 때 서유견문은 500부 정도가 배포되는 데 그쳤다.
이 상황에서 이 두 나라의 운명의 갈림을 어찌 고종에게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민씨 척족의 책임은 이보다 클 것이나, 과연 그것이 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후손으로서 이것을 무능이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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