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크라시와 데모크라시

2009년의 촛불집회는 성공할 수 없다.

이전에도 다른 리플에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지만, 나는 sonnet이라는 인물이 근본적으로 테크노크라시의 신봉자이지 데모크라시의 신봉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 믿음을 가지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가 이 글에서 인용된 코멘트였다.

중우정치론의 대표주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를 지배자의 수에 따라서 1인, 소수, 다수로 나누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할 때와 작동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여 각각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총 6가지의 명칭이 생겨나게 된다. 그 체계는 대략 이런 것이다.

잘 될 때 - 군주정/귀족정/민주정
잘 안 될 때 - 독재정/과두정/중우정

그런데 문제의 글에서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정과 중우정뿐이다. 과두정은 어디로 갔는가? 이것이 sonnet이라는 인물의 중요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테크노크라시의 신봉자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삼권분립은 독재정으로부터의 보호이며 대의제는 중우정으로부터의 보호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사회계약론이 빠지기 가장 쉬운 함정에 빠진 결과라고 본다. 사회계약론은 좋은 정치를 구상하기 위한 디자인의 도구요, 건설의 도구이다. 그것은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것을 롤즈는 정의론에서 명시하였으며,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쓸 때는 그가 살았던 사회가 사회계약론과는 다른 군주정이었다.

권력 분립의 원리는 독재정 출현을 저지하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과두정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이를테면 C.W.밀즈가 심혈을 기울여 묘사한 군정경 복합 파워엘리트 체제에 대해서 삼권분립은 일반 대중에게 어떤 방어를 제공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아니면 우리는 조선시대에 삼사나 상소 등의 제도를 두어 왕권을 견제했던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왕권의 전횡을 막는 데 분명히 성공했고 붕당과 세도정치는 일정부분 이러한 제도들의 어떤 산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견제는 양반 이하의 계층의 복리후생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

다시 말해서 설사 삼권 분립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특권계층으로부터 일반 대중을 보호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장치이며, 이것을 담보하는 수단은 궁극적으로 투표권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대의제와 선거권이 전문적인 정치인에게 결정을 주기 위한 장치였다면, 역사적으로 권력은 상향해서 올라가는 구조를 가졌어야 한다. 마을 단위에서 구나 도 단위로, 그로부터 국가 단위로 점차적인 통합이 일어나는 형태였어야만 "전문적 정치인에게 결정을 맡기는" 구조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유럽의 경우 전형적으로는 국민군주제에 의해 중앙 집권이 먼저 이뤄진 후 시민 혁명과 이후의 투쟁에 의해 선거권이 확대되어가는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흑인이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결국 린든 존슨 시대 이후가 아닌가.

좀 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용할만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어드레스에서는 민주정부를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한다.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이 그것이다. 그런데 삼권분립으로 독재에 대한 보호는 충분하며 선거가 전문가에게 판단을 이양하기 위한 장치라는 견해는, by the people을 담보할만한 근거를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주장할만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자의 이익은 보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내 생각을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선거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 받고 싶은 의사가 있으며 그것을 주장해서 쟁취할 수 있는 계층에게 점차 확산되어 주어져왔던 것이며, 그것은 국민에 의한 정치를 보장하는 장치이고 이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것이 선거와 투표권의 의미이며, 일반 대중이 차티스트 운동을 비롯하여 기나긴 기간에 걸쳐 투표권의 확대를 위해서 투쟁한 실제 역사에 부합하는 설명이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은 분명히 실재한다. 실제로 대의제는 일반 대중에 비해서 전문가이거나, 그것이 아니면 적어도 그 문제에 집중할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책 결정을 맡기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데모크라시를 통한 테크노크라시를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게 된다. 중요한 결정에 대한 권한은 그것을 내릴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맞다. 이 둘의 조화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생겨날 수 있고, 여기서 언급한 글 역시 이에 대한 글이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떠한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선거제도가 전문가에게 판단을 이양하기 위한 제도라는 견해는 이 중 데모크라시보다는 테크노크라시에 가까운 것이고, 이 결론을 내린 사람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선불로 보수를 받아버린 대리인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믿는 나와는 다른 대답이며, 아무것도 담보되지 않는 약속을 믿으라는 위험한 권유이기도 하다.

by ουτις | 2009/05/04 02:45 | 리버럴의 앙심 | 트랙백 | 핑백(1)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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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제도라는 데에 일부 공감하지만,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민주주의란 제도적이고 기술적인 데에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입장은 민주주의적이라기보다는 기술관료적(테크노크라시)이라는 의심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sonnet의 현실주의적 민주주의 이론은 다분히 미국적이며 기술적 분석의 강점과 허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의 민주주의 이론은 유효하나, ... more

Commented by ㅂㅈㄷ at 2009/05/04 04:22
동의합니다
Commented by ουτις at 2009/05/05 21:57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sprinter at 2009/05/04 10:17
음, 저는 이게 테크노라트 - 데모크라트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투표권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sonnet님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투표권은 현실적으로 '견제권'으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개념이 이상한것 같지는 않은데요, 데모크라트는 관료제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인가요?
Commented by ουτις at 2009/05/05 18:25
http://leopord.egloos.com/4131828

따로 길게 글을 쓸만한 여유가 없는지라 관련된 논의에 대한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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