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25일
꿀벅지 파문에 대해서 긴 글을 하나 더 쓸 뻔 했지만 잘 참았다. 병림픽의 월계관을 쓸 자는 '식은 떡밥 끝까지 붙들고 물어지는 놈'이라는 평소 지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상당히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성희롱의 판별은 본인이 수치심을 느끼는지 여부'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이 말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하다. 이 말은 애초에 폐기되었어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 엄숙주의의 희화화된 초상으로 leg는 자주 인용된다. 풍성하게 하체 모양도 안 보이는 치마를 입고, leg이라는단어만 들어도 경끼를 일으키고, 연주중인 그랜드 피아노 다리까지 가리는 집요함에 현대인이라면 충분히 웃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어느 귀부인이 타임슬립이라도 해서 21세기로 넘어왔다고 치자. 한 시간도 못 되서 마주칠 현대 여성의 미니스커트와 핫팬츠와 맨다리를 드러낸 그랜드피아노-_- 등에 대해서 경끼를 일으키고 있는 이 부인을 위해서 현대 사회를 바꿔줘야 할 이유는없다. 그것은 그 귀부인의 사정이다. 죠리퐁이나 소나타3 헤드라이트를 보고 이상한 망상을 하는 것이 어느 아줌마의 개인 사정인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200년 후 세계적으로 엄숙주의가 강화될지 완화될지는 알 수 없다. 완화된다면, 현재 여성들이 성적 수치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미래인들은 지금 우리가 빅토리아 시대를 돌아보듯이 그저 희화화의 대상으로 여기고 웃을 것이다. 만일 강화된다면 현재의여성들이 괜찮다고 여기는 것들조차 미래의 인류에게는 성적으로 타락했던 한 시대의 단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개인의 자격으로 '무엇이 성적 수치심의 대상이고 무엇이 아니다.' 라고 잘라 말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누가 그토록 무식하고 용감하단 말인가?
법에서 쫓아야 할 두 마리 토끼는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이다. 다시 말해서 법적 판단은 일반 상식에 부합해야 하지만, 일반상식에 부합하기 위해서 법조문 해석에 임프로바이제이션을 과도하게 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각 상황에 대한 법적 판단이 어떻게 될지를 전혀 모른다면 인간은 불안해서 어떻게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형사적으로 개인의 법적 안정성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죄형 법정주의이다.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려면 그것을 범죄로 규정하는 법조항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범죄가 되지 않으며 그 행위는 처벌받을 수 없다.
어떤 행위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고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에 대해서 처벌을 하겠다고 누군가 나선다면, 당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억울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을 가장 명확한 언어로 표현한 것은 롤즈일 것이다. 그는 정의의 요건으로 사회적 합의와 함께, 그것이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을 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성희롱은 당하는 사람의 수치심 여부'라는 말은 납득되어서는 안 될 논리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성희롱인지 아닌지 여부를 내가 알 수 없다면, 그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고 더 나아가 법적 제재까지 받을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기준은 결코 개인의 주관이 아니라 일반 상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사자의 성적 수치심 여부'라는 말에 일말의 진실도 없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담긴 일말의 진실은, 성희롱 여부를 판별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 타당성을 달성하는 것이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이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 성희롱에 해당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대다수의 남성들도 인정할 것이다. 어떤 특정 행동을 했느냐, 특정한 어휘 등을 사용했느냐의 기계적 판단이 아니라 각 상황에 따른 폭력성과 억압의 존재 여부를 따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대단히 ad hoc한 성질, 그것이 '당사자의 성적 수치심 여부'라는 말이 담고 있는 일말의 진리이다.
그 타협점은 최초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 쓰는 것이 될 것이다.
'성희롱의 판별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보아, 여성으로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지 여부'
사실 여전히 싸울 거리는 많다. 저기서 말하는 일반인에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여성만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나는 당연히 남성이 포함된다고 주장할 것이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외 오만가지 논쟁 가능한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으나, 적어도 최초보다는 훨씬 나은 판별식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꿀벅지라는 단어의 무례함과 성희롱 여부는 그냥 다수결에 부치면 될 일이었다. 기분 나쁜 사람이 많으면 쓰지 말기로 정하면 될 일일 뿐 그 이상의 해석은 자기 개인에게 맡기고 속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진 일은, 자기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희생양이 되고 피해자가 되어, 그것을 기반으로 도덕적인 우위를 주장하고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을 변태 내지는 덜 떨어진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언어폭력이었다.
몇일 간의 논쟁에서 '의견이 다른 상대를 설득할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을 결집 시키는 대내선전용 포스팅'을 많이 보았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쉽다. 사실에 대한 해석 권한을 홀로 독점할 자격이 있는 양 마음대로 전제를 정해서 일정한 형식 논리를 갖추면 된다. 거기다가 의견이 다른 쪽을 향한 조소와 호통을 섞어주면 된다. 설득의 가능성은 부쉬가 이슬람교로 개종할 정도의 확률이겠으나, 같은 편끼리 읽기에는 말도 되어 보이고 속도 후련하다.
'상징'이라고 하는 대단히 모호한 근거를 가지고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해석의 권리를 독점했다고 주장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불편했으며, 실상 정말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소수'를 제외한 남성은 모두 잠재적 강간범으로 몰아붙이는 언어폭력은 부쉬의 예방적 자위권 행사 개념과 대체 무엇이 다르며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지금보다 어린 시절에는 꼴페미라는 말을 싫어했는데, 사실 지금은 그 단어가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 이 둘을 구분하지 않기에는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불쌍하다.
# by ουτις | 2009/09/25 21:42 | 오늘 내 머릿속 | 트랙백 | 덧글(6)